“양보를 선택한 순간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Alejandro Jodorowsky의 영화 The Holy Mountain을 본 적이 있는가?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괴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난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희대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비록 그의 영화를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수준의 강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서 관객에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잊을 수 없는 정신적인 체험을 경험하게 해 준다. 추가로 예를 들자면 Kenneth Anger의 Lucifer Rising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이해의 영역에서 벗어나 영상 그 자체로 독특한 체험을 가능케 해 준다는 점에서 많은 팬들을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몇 달 전 무려 두 시간이 넘어가는 거대한 괴작을 들고 혜성처럼 등장한 벨기에의 밴드 Neptunian Maximalism의 데뷔작 Éons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18년 리더Guillaume Cazalet(예명:CZLT)에 의해 결성된 이 밴드는 CZLT가 색소포니스트 Jean Jacques Duerinckx와 함께 즉흥 연주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CZLT의 친척 Sebastien Schmit과 Pierre Arese가 드러머 및 기타 타악기 담당으로 합류하면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이틀 동안 즉흥 연주를 이어가면서 녹음을 마쳤고, 이후 Czlt가 세 달 동안 이 결과물들을 정리하면서 보컬 및 세션 부분들을 멤버들과 함께 추가로 녹음했다. 그렇게 이 앨범이 탄생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사전 작곡 없이 즉흥 연주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 이들이 즉흥성을 강조한 이유는 즉흥 연주가 그들의 영혼 그 자체를 어떠한 제약 없이 곧이곧대로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색소폰 솔로의 경우 원테이크로 녹음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앨범의 테마 또한 실로 비범하고 초현실적인 소재를 삼고 있는데, 밴드의 마스터마인드 CZLT에 따르면 앨범은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자리를 진화된 코끼리가 대체한다는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인류는 현존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닌 ‘Homo-Sensibilis’로 진화해야 함을 제시하며, Homo-Sensibilis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존재라고 상정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 아닌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개념이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당 부분은 CZLT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직역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류는 동물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며, 동물을 ‘잠재적 인간’으로 여겨 우리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할 필요도 있음을 언급했다. 또한 몇몇 종들은 더욱 높은 의식 수준을 지닌 존재로 진화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코끼리의 경우 실제로 진화 과정에서 인류 못지않은 의식수준을 가질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리하여 앨범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자의식을 갖춘 진화한 코끼리들, 일명 ‘Proboscidea-sapiens’들이 인간을 대체하고 스스로의 문명을 발달시켜 HELIOZOAPOLIS라는 도시를 건립하게 되는 내용이 등장한다.
앨범의 가사는 한술 더 떠서 인류의 원시 언어를 상정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이러한 가상의 언어는 아무렇게나 막 만든 것이 아니라 케임브리지 대학의 언어학자 Pierre Lanchantin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라고 한다. 앨범의 부클릿에는 이 원시 언어를 적은 가상의 문자가 적혀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 앨범은 온갖 기기묘묘한 설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앨범의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 그러한 배경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할 의무는 없다. 애초에 앨범의 가사가 인류의 원시 언어를 가정한 가상의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어떤 의미이고 저 부분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불필요한 분석이 무의미함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리뷰는 앨범의 내·외적 정보와 혹시나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개인적인 해석 등을 전달하기 위해 자세하게 서술해 본 것이다.
Neptunian Maximalism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눈길까지도 잡아채는 마력을 지닌 앨범 커버는 일본의 화가 KANEKO Tomiyuki의 2014년도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인 Vajrabhairava(바즈라바이라바, 야만타카로도 불린다.)는 티베트 불교에서 등장하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앨범 내에서도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앨범은 3CD, 3LP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합 2시간 8분 정도의 방대한 분량을 담고 있다. (유튜브에 전체 앨범으로 올라와 있는 영상은 2시간 13분 정도인데 각각 곡의 끝부분에 공백이 불필요하게 담겨 있으니 Bandcamp 스트리밍 등의 다른 방법으로 듣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각각의 디스크에 To The Earth(Aker Hu Benben), To The Moon(Heka Khaibit Sekhem), To The Sun(Ânkh Maât Sia)이라는 제목과 부제가 달려 있다. 우선 지구, 달, 태양의 이름을 따온 것은 점성술에서 차용한 것으로, 한때 지식으로 여겨졌던 점성술적 가치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괄호 안의 부제는 이집트 신화의 신 또는 관련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각각의 디스크에 수록된 곡명은 ‘개별 디스크명-세계 곳곳의 문화에서 따온 소재-앨범의 스토리와 흐름을 서술하는 부분’ 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리뷰에선 편의상 개별 디스크명은 생략하겠다. 앨범의 흐름은 대강 지구의 탄생과 역사, 인간과 자의식을 가지게 된 동물들 간의 대립과 동물들의 승리, 그리고 이 'Proboscidea-sapiens'라고 이름 붙여진 진화된 동물들의 번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명에는 지질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나 세계 각국의 신화 및 오컬트 등과 관련된 단어들이 많이 담겨 있으며 이에 대한 서술은 단지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어지는 부분이 복잡하고 요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양해 바란다.
첫 번째 디스크 To The Earth의 첫 번째 곡 Daiitoku-Myōō no ŌDAIKO 大威徳明王 鼓童 - L'Impact De Théia durant l’Éon Hadéen는 명왕누대, 즉 선캄브리아 시대와 약 45억 년 전 지구와 충돌하여 달 탄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거대 충돌설 속의 천체 테이아(Theia)에 대한 곡이다. 여기서 大威徳明王, 대위덕명왕은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밀교에 등장하는 5대 명왕 중 하나이자 아미타불에 대응하는 존재이다. 또한 鼓童는 일본어에서 심장박동으로 풀이된다. 종합해 보면 테이아와의 충돌로 달이 형성되고 격변했던 지구를 대위덕명왕의 고동으로 표현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곡은 유일하게 사전에 앞서 작곡된 리듬에 따라 진행되는 곡으로, 바리톤 색소폰의 육중한 울림과 규칙적인 리듬이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 준다. 이윽고 조금씩 악기가 추가되고 변주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며, 후반부의 색소폰 솔로는 마치 대취타의 태평소를 떠올리게 만드는 동양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중독성 넘치는 리듬으로 앨범의 포문을 활짝 열고 청자의 관심을 끄는 신묘하고도 강렬한 곡이었다.
두 번째 곡 NGANGA - Grand Guérisseur Magique de l’ère Probocène에서 NGANGA, 즉 응강가는 콩고어로 영적 치유사를 의미하며 아프리카의 여러 지방에서 무당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이 곡은 인류 이후의 시대, 즉 Probocene Era의 영적 치유사 응강가를 상정하고 있는 곡이다. 좀 더 이국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이 곡에선 우선 진득한 베이스라인이 귀를 사로잡으며, 서서히 쌓아 올리는 곡 구성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세 번째 곡 LAMASTHU - Ensemenceuse du Reigne Fongique Primordial & Infanticides des Singes du Néogène의 LAMASTHU(Lamashtu), 즉 라마슈투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갓난아기들을 납치해 살해한 악마이며, 이 앨범에서는 신생대의 제 3기 시기 에 영장류, 즉 인간의 새끼들을 살해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 곡은 실로 파괴적인 도입부로 시작한 다음 극단적으로 무겁고 느린 드론 둠 사운드를 보여준다.
네 번째 곡 PTAH SOKAR OSIRIS - Rituel de l’Ouverture de la Bouche dans l’Éon Archéen에서 PTAH SOKAR OSIRIS는 각각 이집트의 창조신 프타, 죽은 자들과 묘지의 신 소카르, 죽음의 신 오시리스를 뜻한다. 그 다음 부분은 시생누대, 즉 명왕누대 이후 지구의 40억 년 전~25억 년 전 시기, 즉 생명이 태동하던 시기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앨범 내에서 최고로 손꼽는 이 트랙은 앞선 곡과 이어지며 무거운 분위기 또한 넘겨받아 장중하게 시작했다가 곧이어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며 조금씩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간다. 색소폰과 기타(+시타르)가 연주를 주고받으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북돋을 뿐 아니라, 길게 뻗어 나가는 보컬의 절규 이후 이어지는 색소폰의 육중한 울림은 실로 청자를 짓이기는 수준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이후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가 사뿐히 연착륙을 하듯이 내려앉으며 다음 트랙으로 이어진다. 연주와 분위기, 그리고 곡 구성에 이르기까지 가공할 만한 마력을 지닌 곡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다섯 번째 곡 MAGICKÁ DŽUNGL'A - Carboniferous에서 DŽUNGL'A(Džungla)는 폴란드어로 밀림을 의미하며 Carboniferous는 식물이 번성했던 석탄기를 의미한다. 2분이 조금 넘는 짤막한 이 곡에선 저음의 기타에 즉흥 연주가 더해진다.
여섯 번째 곡 ENŪMA ELIŠ - La Mondialisation ou la Création du Monde: Éon Protérozoïque에서 ENŪMA ELIŠ, 에누마 엘리시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창세 서사시이다. 이 곡은 Éon Protérozoïque, 즉 시생누대 이후의 원생누대에 대한 곡이다. 베이스가 이끌어 가는 이 곡은 주술적인 보컬로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더하고, 중반부에서는 걸쭉한 베이스라인의 참맛을 느낄 수도 있다. 곡 후반부에선 첫 번째 디스크를 끝맺는 장중한 마무리를 선사한다.
이와 같이 첫 번째 디스크는 강렬한 오프닝부터 장엄한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록/메탈의 격렬함과 프리 재즈의 즉흥성, 그리고 토속적이고도 오컬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씩 모두 공존한다. CZLT에 따르면 To The Earth는 신성함과 불경스러움, 사랑과 증오, 여성성과 남성성 등의 균형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세 개의 디스크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접하기 쉬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트랙의 캐치함과 중독성, 네 번째 곡의 치밀한 구성과 마지막 곡의 진중한 마무리 등 킬링 트랙이 집중되어 있는 디스크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디스크 To The Moon의 첫 번째 곡 ZÂR - Empowering The Phurba / Éon Phanérozoïque에서 ZÂR는 에티오피아 등 동부 아프리카에서 악령 또는 혼령을 의미하는 존재로, 인간에게 빙의하여 해악을 끼치는 대상이다. 또한 Phurba는 티베트 불교에서 각종 의식이나 엑소시즘 등에서 사용했던 도구이고, Phanérozoïque는 원생누대 이후의 현생누대, 즉 캄브리아기부터 현재까지를 의미한다. 인트로부터 더욱 기이하고 오컬트적인 느낌을 부각시키는 이 곡은 첫 번째 디스크보다도 더욱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캐치한 면모가 있는 곡이고, 잔뜩 이펙터를 먹인 기타와 드럼, 베이스가 이루는 오묘한 조화를 듣는 재미가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곡부터 네 번째 곡까지는 VAJRABHAIRAVA Part I~III로 이루어져 있다. 앨범 커버의 소재이기도 한 VAJRABHAIRAVA는 야만타카(Yamantaka)로도 불리며 밀교에서 죽음의 신 야마를 정복한 존재이자 앞서 언급한 대위덕명왕과도 대응되는 개념이다. Part I의 Nasatanada Zazas!는 ‘지옥의 문아 열려라!’ 라는 뜻으로 악마 내지는 악령을 소환하는 주문이며, Part III에서 Quaternary Era는 신생대의 마지막 시기이자 인류가 출현하여 존재해 오고 있는 현재까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VAJRABHAIRAVA Part I~III는 인류와 진화한 동물들 간의 전쟁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VAJRABHAIRAVA Part I - The Summoning (Nasatanada Zazas!)에서는 기타의 거친 트레몰로 연주와 원시 인류의 가상 언어 보컬로 청자의 멘탈을 잔뜩 휘저어 놓는다. 붕 뜬 기타와 철저하게 내리깔은 보컬 및 베이스의 요상한 공존이 형용하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가장 짧은 트랙 VAJRABHAIRAVA Part II - The Rising은 사이키델릭함으로 가득 찬 기타 솔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 곡 VAJRABHAIRAVA Part III - The Great Wars of Quaternary Era Against Ego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곡에서는 기타를 포함한 전반적인 연주가 더욱 거칠어지기도 하며 긴박하고 긴장감 있는 전개를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듯 혼란스러운 연주가 이어지다가 서서히 사그라지며 곡이 마무리된다.
다섯 번째 곡 IADANAMADA! - Homo-sensibilis se Prosternant sous la Lumière Cryptique de Proboscidea-sapiens 에서 IADANAMADA!는 사탄 교회의 창립자 Anton LaVey의 저서 The Satanic Bible에 등장하는 표현이며, 이는 16세기 영국에서 일명 ‘천사의 언어’로 만들어졌던 에노키안(Enochian) 언어로 된 말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Proboscidea-sapiens, 즉 진화한 코끼리 앞에 인류가 무릎 꿇게 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곡에서는 분위기가 전환되며 무게감을 강조한다.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곡을 이끌어 가는 색소폰의 울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보컬이 합류하며 곡이 마무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섯 번째 곡 Ol SONUF VAORESAJI! - La Sixième Extinction de Masse: Le Génocide Anthropocène에서 Ol SONUF VAORESAJI 또한 The Satanic Bible에 등장하는 에노키안으로 작성된 표현이며, ‘사탄의 선언’ 중 첫 번째 대목에 있는 표현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여섯 번째 대멸종, 즉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 다채로운 타악기 소리로 혼란스러움을 부각시킨 이 곡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울려 퍼지는 다른 악기들과의 부조화가 특징이다. 하지만 이내 다른 악기들도 조금씩 혼란스러운 연주에 동참하며 그야말로 종말에 어울리는 카오스를 보여준 뒤 점차 사그라진다. 곡 뒷부분의 늘어지는 마무리는 아무래도 이 곡이 두 번째 디스크를 마무리하는 트랙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앨범 내에서 가장 지루하게 느껴졌던 부분이었다. 특히 전체 앨범을 한 번에 완주할 때 이 곡 부분이 가장 늘어지는 느낌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이처럼 두 번째 디스크 To The Moon는 더욱 거칠고 혼란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며 To The Earth보다도 기괴하고 매니악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VAJRABHAIRAVA 삼부작에서는 블랙 메탈의 영향력이 드러나고, 디스크 전반적으로는 둠 메탈의 느낌이 다소 깔려 있기도 하다. 또한 반복적인 리듬이 강조되기도 하며 여기에 가상의 원시 인류 언어를 끼얹음으로써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개인적으로 VAJRABHAIRAVA 삼부작까지는 To The Earth 못지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지만, 마지막 곡 Ol SONUF VAORESAJI!가 지나치게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부분은 앨범의 중~후반부, 즉 일반적으로 앨범에서 가장 늘어지기 십상인 부분인데 곡 자체도 늘어지는 감이 있어서 전체 앨범 완주의 큰 고비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마지막 디스크 To the Sun의 첫 번째 곡 EÔS - Avènement de l’Éon Evaísthitozoïque Probocène Flamboyant에서 ÉOS는 그리스 신화 속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의미한다. 제목의 나머지 부분은 인류 이후의 시대, 즉 Evaísthitozoïque라고 이름 붙여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곡은 18분이 넘어가는 장대한 분량 내내 느린 템포 속에서 진행되며, 리듬도 멜로디도 최소화된 드론 장르의 특색을 보여준다. 하지만 은은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기타와 색소폰의 육중한 울림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듯 듣는다면 지루함이 아니라 서서히 달아오르는 전율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보컬이 등장하는 후반부에서 그 체험의 깊이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두 번째 곡 HEKA HOU SIA - Les Animaux Pensent-ils Comme on Pense qu’ils Pensent?에서 HEKA HOU SIA는 앞선 PTAH SOKAR OSIRIS처럼 각각 이집트 신화의 신들을 의미하며, 뒤이은 표현은 인간과 동물의 사고에 관한 벨기에의 과학철학자 Vinciane Despret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디스크에서 유일하게 박진감 있는 트랙인 이 곡은 느낌상 첫 번째 디스크의 수록곡들과 유사하지만, 이 위치에 배치된 이유는 아무래도 느려진 흐름을 잠시 환기하고 다시금 흥미를 돋우는 효과를 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앞뒤의 두 곡만 도합 30분이 넘어가는 거대한 곡들이기에 이 곡처럼 보다 역동적인 트랙을 배치함으로써 청자의 집중력을 보완시켜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곡에서는 제법 캐치한 베이스라인이 돋보이기도 하고, 앞선 곡들에 비하면 다소 부담감이 덜하며 무난하게 진행된다. 물론 이 곡도 6분이 넘어가는 짧지 않은 곡이지만 직전 트랙 EÔS의 3분의 1 정도 뿐이기에 금방 끝나는 느낌을 준다.
세 번째 곡 HELIOZOAPOLIS - Les Criosphinx Sacrés d’Amon-Rê, Protecteurs du Cogito Ergo Sum Animal에서 HELIOZOAPOLIS는 Evaísthitozoïque처럼 CZLT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로, 인류를 대체한 동물들이 만들어낸 도시를 의미한다. 뒤이은 대목은 자의식을 가진 동물의 수호자인 크리오스핑크스(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를 뜻한다. 앨범 전체의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곡은 사이키델릭하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곡이다. 특히 인도의 전통 악기 시타르가 곡을 주도해 나가며 마치 영적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만 같은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별다른 뜻 없이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보컬과 무게감 있고 나름의 짜임새를 지닌 전개 역시 흥미로우며, 곡 후반부의 시타르 솔로와 장중한 마무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마지막 곡 KHONSOU SOKARIS - We Are, We Were and We Will Have Been에서 KHONSOU(Khonsu)는 이집트 신화 속 달의 신이고, SOKARIS(SOKAR, Seker)는 사자(死者)들의 신이다. 이어지는 대목의 We가 지칭하는 바가 인류인지 아니면 인류를 대체한 동물들인지는 해석하기 나름이겠다. 참고로 We Are, We Were and We Will Have Been은 드론/둠 메탈 밴드 Bong의 앨범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CZLT가 이 앨범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골랐을 뿐 아니라 Bong이라는 밴드 자체가 매우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이 곡은 타악기가 배제되고 오직 색소폰과 현악기만이 존재하는 곡으로,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느낌을 주는 곡이다. 마치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한 듯한 곡으로 잔잔한 여운을 남겨 주며 앨범을 끝맺는다.
마지막 디스크 To the Sun은 CZLT에 의하면 일명 'Solar Drone Opera'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그 때문에 세 디스크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드론 장르의 영향력이 가장 짙게 배어 있다. 깊은 명상에 어울릴 장대한 구성과 완만한 진행은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듯이 감상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Sunn O)))로 대표되는 드론 메탈 계열의 늘어지는 구성을 아주 선호하지는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디스크가 가장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차분하게 명상을 하듯이 들어 보며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디스크 전체가 드론 사운드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두 번째 트랙 HEKA HOU SIA로 완급조절을 하며 지나치게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고, 세 번째 곡 HELIOZOAPOLIS에선 시타르의 연주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앨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등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디스크가 아니었다.
세 디스크를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먼저 리뷰하기도 했던 Spectral Lore와 Mare Cognitum의 Wanderers: Astrology of The Nine이나 Paysage d'Hiver의 Im Wald같은 대작들과 마찬가지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앨범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이 앨범이 방금 언급한 두 작품과 비교했을 때 갖는 가장 큰 차이점 둘은 우선 첫째, 선뜻 어떤 장르의 음악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장르들이 뒤얽혀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 번에 발매된 일종의 연작 앨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프리 재즈와 드론 및 여타 록 메탈 장르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 세계 각국의 전통 음악 스타일도 담겨 있으며, 특히 시타르를 사용한 인도 음악의 느낌이 짙게 나타난다. 흔히 록/메탈 장르에서 타 장르와의 융합을 선보인 밴드들이 대개는 록과 메탈의 범주 안에서만큼은 벗어나지 않은 반면 이 앨범은 한 장르로 말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이 앨범이 삼부작 시리즈를 묶어서 한꺼번에 발매한 경향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다. 이는 마치 Blut Aus Nord의 777 삼부작을 한 세트로 발매한 느낌을 주는데, 사실 이러한 시도는 Swallow the Sun의 Songs from the North I, II & III 같은 경우에서 이미 등장한 적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이 유독 특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워낙 다양하고, 또 극단적이기도 한 장르들끼리의 조합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블랙/둠 메탈과 같은 익스트림 메탈뿐 아니라 메탈 장르 내에서도 극단적으로 취향이 엇갈리는 드론 메탈에 프리 재즈의 무질서함과 각국의 전통 음악 및 이집트 신화부터 시작해 세계 곳곳의 문화적 색채가 모조리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과 두 시간이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 덕에 이 작품은 실로 친해지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앨범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몇몇 부분이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다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앨범을 완주하는 것은 고역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과 친해지기 위해서 굳이 한 번에 완주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테마와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세 디스크의 특징과 매력이 워낙 제각각이고 전체 분량 또한 워낙 크기 때문에 각각의 디스크를 따로따로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각각의 디스크에 서로 다른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이는 단지 파트 구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별 디스크가 독립적으로 하나의 앨범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각 디스크의 마지막 곡들은 앨범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끝을 맺으며, 한 디스크 내에서 곡들이 다음에 오는 곡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과는 달리 디스크 사이에 위치한 곡들끼리는 비교적 단절된 느낌이 강하다.
이 앨범은 개인적으로도 쉽게 다가왔던 작품은 아니었다. 물론 첫인상은 상당히 강렬하게 다가왔었지만, 중간중간 늘어지는 부분과 지나치게 난해하게 느껴졌던 부분 탓에 익숙해지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좋았던 부분은 워낙 좋기도 했고 또 묘한 중독성이 있기도 해서 계속 찾아 듣다 보니 점차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디스크별로 나눠 듣는 방법도 나름대로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두 시간이 넘어가는 분량에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시간을 들여 친숙해질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태껏 이 글에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 곡들의 소재 같은 것들을 줄줄이 써 놓았지만 사실 이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이 필수적인 것은 전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앨범은 대부분이 즉흥 연주를 통해 만들어졌으며, 가사 또한 원시 인류가 사용했을 법한 가상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이 앨범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이 앨범은 어떤 장르이고 어떤 스타일이고 연주가 어떻고 등등을 굳이 분석할 이유가 없다. 청자는 단지 흐름에 몸을 맡기고 하나의 정신적 체험으로서 이 거대한 괴작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 이 작품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CZLT가 언급한 Homo-Sensibilis, 즉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에 대해 ‘그럼 뭐 하러 이렇게 길게 써 놨느냐?’라고 질문할 수 있겠는데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작품의 소재, 테마 등등에 관해 서술한 것은 조금이나마 앨범에 대해 앎으로써 작품을 보다 깊게 느낄 수 있게 하거나 앨범을 들으며 떠오르는 의문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감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했음이 개인적인 의도였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괴작을 탄생시킨 CZLT와 그의 독특한 사상과 예술혼에 대해 말해 보는 기회를 갖기도 한 것이다.
Alejandro Jodorowsky는 1968년 멕시코의 아카풀코 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 Fando y Lis 를 상영했다가 자극적인 장면에 분노한 관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이후로도 영화 촬영 당시 멕시코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컬트 영화의 거장이자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John Lennon과 Marilyn Manson 등 영화계 밖의 유명 아티스트들도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렇게 Jodorowsky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다름 아닌 밴드의 리더 CZLT 또한 그의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Jodorowsky의 영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타로 카드의 권위자이기도 한 Jodorowsky의 타로 카드를 매일 연습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마찬가지로 서두에서 언급한 Kenneth Anger의 Lucifer Rising 또한 오컬트적인 요소가 매우 깊게 담겨 있는 도발적인 작품이며, 이 영화의 클립이 Neptunian Maximalism의 홍보 영상에 사용되기도 했다.
Jodorowsky는 2007년 방한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촬영 당시 겪었던 멕시코 정부의 탄압에 관한 질문에 “양보를 선택한 순간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만약 양보를 했다면 예술영화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업영화가 됐을 것이다. 예술이 아닌 상업성을 지닌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피카소가 개성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날 이름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자신의 영화가 어렵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영화는 영화 자체니까. 이해하기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보는 대로 느끼지 않고 ‘어렵다’고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옳지 않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영화를 만든 것은 명성을 위해서가 아닌 예술가 그 자체로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Neptunian Maximalism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음악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서 애써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저 흐름과 분위기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작품의 매력에 매료되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이때 이 앨범이 주는 감흥은 마치 명상을 하다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깊은 정신적 체험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독보적인 음악의 탄생은 CZLT와 동료들이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어떠한 구속도 없이 마음껏 예술혼을 발현함으로써 탄생하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Neptunian Maximalism은 조만간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가 음악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다른 밴드들과 함께 투어를 진행할 계획이라고도 말했다. 그뿐 아니라 CZLT는 원맨 블랙 메탈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 중이고, Neptunian Maximalism의 다른 멤버들과 만든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이들의 기이하지만 자유롭고 독창적인 음악의 세계가 더욱 넓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97/100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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