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서는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판타지나 SF, 또는 추상적인 영역 등과 같은 비현실적인 테마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구현하는 것처럼,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우주를 소재로 한 음악 역시 존재한다. 메탈 음악 장르 내에서도 우주와 천체 등을 소재로 삼는 밴드들이 몇몇 있고, 특히 블랙 메탈 밴드들 중에서 소위 코스믹 블랙 내지는 스페이스 블랙 등으로 분류되는 밴드들의 경우 더욱 적극적으로 우주와 관련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음악을 구사한다.
이러한 코스믹 블랙 메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구자를 들자면 단연 스위스의 Darkspace일 것이다. 물론 90년대 중반 이후 Arcturus, Limbonic Art, Odium 등 심포닉 블랙 계열에서 이미 우주를 소재로 한 몇몇 블랙 메탈 밴드들이 등장하기도 했고, 스위스에서도 Samael이 4집 Passage부터 우주적인 테마와 그러한 분위기의 음악을 구사했었다. 조금 더 과거로 가면 Beherit의 앨범 Drawing Down the Moon이나 Burzum의 곡 My Journey to the Stars처럼 우주 혹은 천체를 소재로 사용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Darkspace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밴드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나갔고, 이것이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Alrakis, Midnight Odyssey, Mare Cognitum 등과 같은 코스믹 블랙 메탈 밴드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코스믹 블랙 메탈 밴드들 이외에도 많은 앳모스퍼릭 블랙 메탈 밴드들이 대개 원맨 밴드로 구성되거나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는(또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특이하게도 3인조 밴드였던 Darkspace는 때때로 라이브 공연을 진행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Hellfest같은 대형 페스티벌의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
Darkspace는 Paysage d'Hiver로도 알려져 있는 만능 뮤지션 Wroth와 기타리스트 Zhaaral, 그리고 여성 베이시스트 Zorgh의 3인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2019년 Zorgh가 탈퇴하면서 현재는 2인조 밴드로 남아 있다. 드러머는 따로 존재하지 않고 드럼머신으로 곡을 녹음했으며, 라이브에서도 드럼 및 앰비언트 파트 등을 틀어놓고 공연을 진행한다.
여러모로 컨셉도 특이한 밴드인데, 앨범명과 곡명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규칙에 맞게 넘버링을 하는 식으로 앨범과 곡의 제목을 붙인다. 또한 기본적으로 곡에 가사가 따로 없고 보컬은 멤버들의 찢어지는 절규가 대부분이다. 간혹 등장하는 샘플링은 2001: A Space Odyssey, Alien, Event Horizon 등등의 SF 영화에서 따왔다.
현재까지 총 4장의 정규 앨범과 초창기 데모, 그리고 이 데모를 리메이크하여 재녹음한 EP가 Darkspace의 전체 디스코그래피이며, 그중에서도 이번에 리뷰할 3집 Dark space III가 이들의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편이다.
초기 데모와 1집부터 칠흑같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거세게 휘몰아치는 전개로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넘치는 음악을 선보였던 이들은 3집 Dark space III에서 스타일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지글지글한 기타 톤과 거칠고 투박한 레코딩, 비인간적으로 빠르고 규칙적인 드럼과 미지에 대한 공포를 그대로 담아내는 듯한 보컬의 절규 등이 결합된 Darkspace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여타 코스믹 블랙 메탈 밴드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압감을 선사해 준다.
1집이 특유의 반복적이고 강렬한 리프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면 2집은 더욱 거대한 대곡 구성에 좀 더 분위기를 강조한 스타일로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2008년 발매된 3집은 1, 2집의 스타일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인상적이고 웅장하기까지 한 대작으로 남게 될 수 있었다.
어둡고 음산한 느낌으로 분위기를 슬슬 잡으며 시작하는 첫 번째 곡 Dark 3.11은 곧이어 보컬의 절규와 함께 터져 나오는 특유의 폭발적인 전개로 청자를 휘어잡는다.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전개를 통해 끝없이 펼쳐진 칠흑 같은 우주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Darkspace만의 기막힌 분위기 메이킹 능력이 역시나 돋보이며, 언뜻 보기에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꽤 다채로운 구성과 완급조절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10분이 넘어가는 곡임에도 루즈해질 틈이 없다. 참고로 중간에 잠깐 나오는 대사는 영화 Event Horizon에서 샘플링한 것이다.
도입부터 무겁게 찍어 누르는 Dark 3.12에선 차디찬 앰비언트 사운드가 돋보이며 마치 절대 영도에 가까운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느낌을 주고, Darkspace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강렬한 저음의 기타 리프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곡의 무게감을 한층 더해준다. 또한 곡의 종결부에서는 서서히 내려앉는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마무리를 보여준다.
역시나 지글지글한 톤의 기타와 함께 시작하는 Dark 3.13 또한 분위기를 이어가며 거칠게 휘몰아치는 전개를 펼쳐나간다. 하지만 곡 중반부에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육중한 기타 리프가 전면에 나서며 가공할 수준의 헤비함을 선보이는데, 이는 마치 Opeth가 6현 스탠다드 튜닝만으로도 무척 헤비한 리프들을 선보였던 것에 비견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를 짓는 구성 역시 아주 인상적이었다.
한편 더욱 비장하고 장중한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Dark 3.14는 우주에 대한 단순한 공포를 넘어 경외심마저 느끼게 만드는 위력을 보여준다. 곡은 이러한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다가 다시 한번 헤비한 리프가 등장하여 분위기를 잠깐 고조시킨 뒤 다시 정제된 스타일로 전환된다. 이 곡의 경우 지난 1, 2집을 포함한 Darkspace의 이전 곡들과 달리 거칠게 휘몰아치는 전개와 절규하는 보컬 없이도 무시무시한 우주의 분위기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이들 디스코그래피에서 유일하게 대곡이 아닌 Dark 3.15는 잠깐 쉬어가는 앰비언트 트랙으로, 80분 가까이 꽉꽉 눌러 담은 이 앨범의 정주행을 돕는 인터미션 역할을 해 준다. 물론 이 곡은 이들의 성취가 단지 메탈적인 측면에서만의 역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짧게나마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다.
여섯 번째 곡 Dark 3.16은 개인적으로 지금껏 들어본 모든 부류의 음악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장엄한 도입부 중 하나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특유의 헤비한 기타 리프와 다크 앰비언트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어내며 그야말로 좌중을 압도하는 사운드를 만들어내는데,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을 정도이다. 고작 기타 두 대와 베이스, 드럼머신과 다크 앰비언트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사운드가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만들어내는 사운드 못지않은 웅장함을 줄 수 있다고 느낄 만큼 이 곡의 도입부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도입부 이후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는데, 이는 John Carpenter의 영화 Prince of Darkness에서 샘플링한 것이다. 충격의 도입부로 시동을 건 뒤 다시금 로켓처럼 터져 나가는 이후 전개는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기존의 스타일로 청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린다.
대망의 마지막 곡 Dark 3.17에선 좀 더 신비한 느낌으로 곡을 시작하다가 곧이어 Dark 3.16의 도입부에 버금가는 수준의 헤비한 리프와 웅장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이후로는 Dark 3.14처럼 비교적 정제된 스타일을 보여주다가 곧이어 앨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돌입하듯 분위기가 최고조로 치닫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17분이나 되는 대곡 내내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며, 곡 중반부 이후로는 서서히 가라앉는 스타일로 은은한 여운을 남기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
종합적으로 이 작품은 소위 코스믹 블랙 메탈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극한을 보여주는 앨범이자, 말 그대로 ‘분위기’를 중시하는 앳모스퍼릭 블랙 메탈계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대작이다. 80분 가까이 꽉꽉 채워 담은 장대한 구성으로 러닝 타임 내내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흑의 우주 한복판에 홀로 내던져진 듯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낸다. 평균 10분이 넘어가는 곡 구성과 앨범 전반적으로 일관된 편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면서도 쉽게 지루해지지 않는 세심한 짜임새와 완급조절을 느낄 수 있다.
쉴 틈 없이 거세게 몰아치면서도 때때로 헤비한 리프가 전면에 나서며 장중한 비장미를 더하고 더욱 알찬 곡 구성 또한 가능하게 해준다. 리프 구성은 대체로 단순한 편이고 톤 역시 거칠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때때로 에픽한 느낌마저 들게 할 정도로 잘 짜여 있다. 인간으로서는 흉내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드럼 프로그래밍 역시 의도적으로 비인간적인 티를 냄으로써 인간성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우주의 무자비함을 표현해낸다. 멤버 세 명 모두의 절규로 이루어진 보컬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담아내며, 마치 영화 Event Horizon의 지옥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수준의 아비규환을 연출해낸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느낌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앰비언트 사운드는 차갑고 고독한 분위기,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 그리고 공포와 경외심마저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모두 만들어 준다.
이 앨범을 지하 벙커에서 녹음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레코딩 상태는 여전히 거칠고 투박한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지만, 사실 1, 2집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끄럽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때문에 공포적인 요소에 집중했던 1, 2집에 비해 이번 앨범은 조금 더 신비하거나 웅장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다. 비인간적인 드럼 프로그래밍과 보컬들의 절규가 더해진 폭발적인 전개가 청자를 우주 미아로 만들어 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장미 넘치는 리프들과 신비한 스페이스 앰비언트로 우주의 장엄한 신비를 담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끝없이 펼쳐진 칠흑 같은 우주에 홀로 고립된 것 같은 공포와 그 거대한 장엄함에서 오는 경외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Darkspace의 음악적 스타일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Tangerine Dream 같은 밴드나 아티스트에 의해 이미 50여 년 전부터 존재해온 스페이스 앰비언트 스타일을 블랙 메탈에 완벽히 접목시킴으로써 무음의 우주 공간에 대한 감상을 형상화하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주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며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그 자체에 집중하는 스페이스 앰비언트와 달리 Darkspace는 블랙 메탈의 파괴적인 측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전대미문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우주 공간을 역설적이게도 가장 시끄럽고 파괴적인 소리들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공포, 신비함, 경외 등과 같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감상을 실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Darkspace의 존재로 인해 우주를 테마로 한 일명 코스믹 블랙 메탈 밴드들이 다수 탄생하게 되었으나, Darkspace의 존재감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수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Midnight Odyssey, Alrakis, Mare Cognitum, Mesarthim, Battle Dagorath 등 많은 코스믹 블랙 메탈 밴드들이 저마다의 우주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Darkspace의 아성을 넘어설 만한 밴드는 아직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단, Mare Cognitum과 Spectral Lore같은 경우 나름 독자적인 색을 보여주면서도 Darkspace에 버금갈 만한 수준에 올라섰다고 본다.) 실제로 Darkspace는 2019년 스위스 베른 주에서 주최한 ‘Musikpreise 2019 des Kantons Bern’에서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최근까지도 그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처럼 Darkspace가 독보적인 위치에 자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무래도 Paysage d'Hiver로도 알려진 핵심 멤버 Wroth의 역량이 그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물론 원맨 밴드인 Paysage d'Hiver와 달리 3인조 밴드였던 Darkspace의 경우 다른 두 멤버인 Zhaaral과 Zorgh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Zhaaral은 2009년 Sun of the Blind라는 원맨 밴드의 이름으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고, 2019년 Darkspace에서 탈퇴한 Zorgh는 Apokryphon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작년 앨범을 발매한 만큼 나머지 두 멤버도 작곡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베이시스트 Zorgh가 작년 진행한 인터뷰에서 타인과 함께 음악을 하는 동안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포기해야만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었다는 식의 답변을 한 만큼 Darkspace의 주축은 역시 Wroth(Paysage d'Hiver)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이런 식으로 추측에 의해 글을 작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Darkspace가 줄곧 신비주의 컨셉을 유지하느라 그들에 대한 정보가 워낙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Zhaaral와 Zorgh같은 경우는 본명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이다.
아무튼 Darkspace의 주축으로 추정되는 Wroth의 역량은 이미 90년대부터 Paysage d'Hiver를 통해 증명된 만큼 Darkspace의 성공 또한 필연적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레코딩과 앰비언트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매우 파괴적인 스타일이 공존한다는 점이 Darkspace와 일맥상통하고, Darkspace가 우주의 분위기를 완벽히 그려낸다면 Paysage d'Hiver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의 풍경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만큼 Darkspace가 Paysage d'Hiver의 연장선에 있는 밴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Wroth가 인터뷰에서 Paysage d'Hiver가 ‘소우주’라면 Darkspace는 ‘대우주’라고 답한 것처럼 Paysage d'Hiver와 Darkspace는 상호 보완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4년 발매된 Darkspace의 4집 Dark space III I 에서는 더욱 깔끔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레코딩을 선보인 바 있는데, 이러한 면모는 작년 발매된 Paysage d'Hiver의 첫 ‘정규’ 앨범 Im Wald에서 보여준 비교적 말끔해진 스타일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한편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현재 Darkspace의 신작 발매를 위해 작업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Paysage d'Hiver의 금년 신작 Geister가 작년 2월 이전에 이미 녹음을 마쳤었다고 하니 빠른 시일 내에 Darkspace의 귀환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한다. 비록 베이시스트 Zorgh가 탈퇴하기는 했지만, Darkspace는 준비가 된다면 언제든 다시 돌아와 소리없는 우주에 대한 공포와 경외심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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