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nio Morricone부터 The Chasm까지
미국의 2인조 밴드 Tempel은 본래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 결성한 5인조 밴드였다. 하지만 졸업 이후 멤버들이 저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 결국 이들은 기타리스트 Ryan Wenzel과 드러머 Rich Corle로 이루어진 2인조 밴드로 개편되어 활동해 오고 있다. 또한 이들이 처음부터 보컬리스트가 없는 연주 밴드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새로운 보컬을 찾고 싶지 않았기에 현재까지도 보컬 없는 밴드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1집 On the Steps of the Temple은 2005년에서 2009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첫 녹음 이후 재녹음 작업 등의 수정을 거쳐 2012년에 자체적으로 발매되었다. 이후 그들은 라이브나 홍보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이들의 음악에 매료된 Prosthetic Records 측의 연락으로 계약을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1집 On the Steps of the Temple의 CD/LP 제작 및 발매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1집 이후 약 3년 뒤 발매된 2집 The Moon Lit Our Path은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비록 작지만 매우 순도 높은 호평을 받으며 팬들을 만들어 낼 정도로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보컬과 가사가 존재하지 않는 연주 밴드라는 것이다. 물론 메탈 장르 내에서 연주 밴드란 단지 그것만으로 그렇게까지 큰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비교적 가장 가까이 있는 밴드로 앳모스퍼릭 슬럿지 내지는 포스트 메탈로 불리우는 Pelican이 이들의 선배 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연관성은 적지만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드론 메탈 밴드 Earth나 Marty Friedman, Jason Becker 등의 솔로 앨범들까지 메탈 연주 앨범으로 언급해 볼 수도 있겠다. 또한, 최근에는 젠트 계열에서도 연주 앨범을 주력으로 삼는 밴드들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만큼 단순히 연주 밴드라는 것만으로는 이들만의 색깔을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만의 개성은 무엇인가? 요약하자면 이들 역시 2010년대에 두각을 나타냈던 몇몇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경계를 깨부수고 색다른 조화를 이루어 내며 자기들만의 사운드를 구축했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인터뷰에서 기타리스트 Ryan이 밝혔듯 이들의 음악적 뿌리는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Opeth, Deathspell Omega, Drudkh, Pig Destroyer, The Chasm, Enslaved, Pelican, Genesis, Rush, 그리고 Pink Floyd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영향을 준 음악은 실로 무수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2집 The Moon Lit Our Path에서는 Ennio Morricone의 영화음악에 대한 깊은 영향력까지 언급하기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들의 음악은 분위기를 중시하면서도 짜임새 있고 다채로운 구성이 돋보이는 연주력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독특한 감수성을 표현하며 듣는 재미 또한 잡아냈다는 점에서 그 실력과 개성을 모두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번 2집은 기타리스트 Ryan이 아내에게서 선물 받은 8현 기타를 사용하여 녹음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8현 기타를 사용한 주요 목적은 낮은 튜닝을 활용한 헤비하고도 멜로딕한 리프를 사용하면서도 젠트의 형식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러한 의도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각각의 곡을 들어보면 보다 확실히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앨범을 시작하는 첫 번째 곡 Carvings In The Door는 가장 캐치한 리프들이 많이 녹아들어 있는 곡이다. 8현 기타의 육중한 사운드로 진득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귀에 쏙쏙 박히는 리프들로 청자에게 단번에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 준다. 또한 쉴 틈 없이 꽉꽉 들어찬 곡 구성으로 8분 가량의 대곡 진행을 지루할 틈 하나 없이 마무리하며 잊을 수 없는 첫 인상을 남겨 주었던 첫 번째 트랙이었다. 특히 곡 후반부에서 분위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부분은 그야말로 앨범의 백미 중 하나였다.
한편 이어지는 The Moon Lit Our Path는 좀 더 분위기를 중시하며, 제목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과 그 속에서 길을 비추는 달빛이 공존하는 느낌을 조성하며 앨범 커버의 이미지를 청각화하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좀 더 분위기 위주로 곡이 진행된다고 해서 단지 평탄하고 무난한 전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칙적인 구성을 통해 완급조절을 하여 늘어질 염려를 원천봉쇄했다. 그 예로 중반부의 그루브함이 느껴지는 브레이크다운과 후반부의 유려한 리드 기타 플레이 등으로 다채로움을 더했다. 또한 물 따라 바람 따라 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곡의 흐름을 통해 뚜렷한 곡의 기승전결을 표현해냄으로써 10분 가까이 되는 대곡을 금세 끝내버리는 인상을 받았다.
12분이 넘어가는 세 번째 곡 Descending into the Labyrinth역시 특유의 무겁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강렬한 리프들이 공존하는 곡이다. 반면 이 곡에서는 어쿠스틱 기타와 솔로를 활용하거나 톤에 변화를 주기도 하는 등 앞선 곡들과 몇몇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앨범의 중반부를 지나는 무렵에서 분위기를 환기하여 뻔하고 예측 가능한 전개에서 벗어나는 역할을 해 주었다. 또한 곡 후반부에서 서정미 또한 불러일으키며 분위기를 차차 고조시켜나가다가 묵직한 리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부분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무거운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과 키보드가 조화를 이루며 시작하는 네 번째 곡 Tomb of the Ancients는 곧이어 이어지는 진득한 전개로 초반부터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후로는 거친 연주가 이어지며 착착 감기는 리프와 격렬한 드럼의 질주가 계속되고,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빽빽한 구성과 깔끔한 마무리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한편 곡 후반부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 중 일부는 The Chasm의 연주곡 Procession to the Infraworld의 리프들 중 하나와 매우 유사했는데, The Chasm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마지막 곡 Dawn Breaks over the Ruins 또한 짤막한 어쿠스틱 파트로 시작했다가 곧이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곡이 진행된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곡답게 곡 전반적으로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선보이되, 중반부에서 한 번 잠시 가라앉으며 클라이맥스를 예고하는 전개를 보여준다. 이후 선보이는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마치 일렁이는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넘쳐흐르는 비장미 속에서 완벽한 마무리를 선사했다. 또한 이 곡의 분위기와 형식은 Ennio Morricone의 불후의 명곡 The Ecstasy of Gold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8현 기타를 활용하여 1집 On the Steps of the Temple보다도 더욱 무게감 넘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더욱 진보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라이브를 하지 않는(사실상 할 수 없는) 밴드의 특징을 역이용해 최대 4~5대의 기타를 동시에 등장시키는 등 라이브를 포기한 대신 음원 그 자체의 꽉 차고 풍성한 느낌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스튜디오 엔지니어가 본업인 기타리스트 Ryan Wenzel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녹음을 작업을 진행했으며 덕분에 더욱 깔끔하고 의도한 그대로의 사운드 및 분위기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수록된 다섯 곡 모두 저마다의 뚜렷한 색채와 최상의 완성도를 선보였으며, 전반적인 분위기 역시 전성기 Opeth나 굴지의 블랙 메탈 밴드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부족함이 없으면서 자신만의 개성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머리를 절로 흔들게 만드는 리프들로 보컬 없이도 듣는 재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더욱이 8현 기타를 활용한 압도적인 무게감을 선보이면서도 젠트 계열 등 기존의 8현 기타를 사용하는 밴드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 즉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방식을 활용한 특색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보컬이 없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강렬하면서도 듣기 편하게 만들었다는 점 역시 당연하지만 분명한 특색 중 하나라고 본다. 때문에 이 앨범은 음악에 집중하며 감상해도 좋고 다른 일을 할 때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아도 좋은 다방면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앨범 커버 역시 지금껏 본 앨범 커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커버 중 하나였다. 이는 보컬과 가사 없이 오직 연주로만 승부를 봐야 하는 이들 음악의 특성상 앨범 커버가 음악의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은 훨씬 클 수밖에 없기에 더욱 신경을 쓴 결과일 것이리라. 커버는 Lucas Ruggieri라는 미국인 미술가가 담당했으며, 먼저 밴드 멤버들이 앨범의 제목과 컨셉을 그에게 알려준 뒤 그가 이를 바탕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장 중인 앨범 내에는 앨범 커버 부분을 포함한 커다란 전체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속에서 앨범 수록곡들의 제목과 분위기를 하나하나 찾아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시각적 예술과 청각적 예술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앨범 커버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이들의 음악은 그야말로 연주 앨범의 일대 혁명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훌륭했다. 연주 앨범으로서 이 앨범이 이루어낸 성과는 매우 인상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연주 앨범의 경우 보컬이 없다는 점에서 오는 심심함이나 혹은 그 점을 보완하려다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주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적절한 예시로 The Chasm의 최근 앨범 A Conscious Creation from the Isolated Domain - Phase I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개인적으론 이 앨범의 새로운 시도 역시 높이 평가하며 상당히 좋게 듣기도 했지만, 이전 앨범들에서 종종 등장했던 연주곡들과도 사뭇 다른 스타일로 더욱 실험적인 시도를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전 앨범들에 미치지 못하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앨범 내에 연주곡을 몇 곡 끼워 넣는 것과 앨범 전체를 연주곡으로만 만드는 것의 뚜렷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앨범 전체가 보컬 없이 연주로만 구성되었다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곡에서 보컬 파트를 빼놓은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며, 보컬의 빈자리 또한 채우는 것이 연주 앨범의 가장 큰 과제이다.
그리하여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은 화려하고 테크니컬한 솔로들로 연주 앨범을 채우거나, 슬럿지/포스트 메탈 밴드들은 분위기를 적극 부각시켜 굳이 보컬이 필요 없는 음악을 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근본적으로 짜임새 있는 리프들의 구성을 통해 보컬 없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제 3의 길을 찾아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앨범은 마치 The Call of Ktulu, Stream of Consciousness, Procession to the Infraworld같은 명 연주곡들로만 구성된 독자적인 메탈 앨범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특수성을 지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Metallica가 The Call of Ktulu같은 곡으로 가득 찬 연주 앨범을 만든 셈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색깔과 완성도는 가히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의 사운드는 Ennio Morricone와 Pink Floyd부터 The Chasm과 Deathspell Omega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향력 하에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실로 다채롭고 독특한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연주로만 이루어진 메탈 앨범들은 존재해왔고, 특히 슬럿지/스토너/드론/포스트 메탈 계열 장르에서 연주로만 승부를 보는 밴드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밴드들과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의 다채로운 대곡 구성과 무거우면서도 거침없이 몰아치는 리프들의 연속, 독특한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이들만의 강점은 프로그레시브한 면모 속에서도 돋보이는 맛깔나는 리프 진행과 육중한 무게감과 공존하는 환상적인 분위기가 모두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프로그레시브한 구성과 앳모스퍼릭 슬럿지 내지는 포스트 메탈적인 분위기, 스래쉬/데스 풍의 착착 감기는 리프들, Opeth류의 서정미와 비장미가 공존하는 강렬한 연출, 그리고 Drudkh같은 블랙 메탈의 느낌을 전부 이 하나의 앨범에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이 앨범도 2010년대를 빛낸 다른 적지 않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장르적 틀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녹여내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부류로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이미 앞선 음악가들이 이룩해놓은 것들을 적절히 배합한 것에 불과하며 새로움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이것들도 ‘새롭다’라는 것이 중요하다. 인도의 커리가 일본과 한국에서 카레로 바뀐 것이나, 중국의 자장몐이 한국의 짜장면이 된 것처럼 원본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독립적이고 새로운 저만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장르 간 융합은 조금만 잘못하면 매우 어색해지기 쉽기 때문에 훨씬 더 폭넓은 이해와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또한 이를 통해 기성 밴드들의 사운드와는 또 다른 분명한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고, 이것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완수해낸 음악만이 장르적 한계를 넘어선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리스크들을 이겨내고 탄생한 작품들은 새롭지 않다고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높이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채 100년이 되지 않는 록과 메탈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위대한 밴드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오며 음악의 가지를 현재까지도 계속 뻗어 나가게 만들고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새로운 가지들도 계속 돋아나고 있다. 비록 최근의 매탈 장르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Tempel을 포함한 여전히 많은 밴드들이 저마다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활로를 찾아 나가고 있다. 비록 아직까지는 이러한 흐름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분명히 크고 작은 혁신의 길로 이어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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