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니무스의 삶을 추억하는 유로니무스 헌정 리뷰*
NRK 등 여러 미디어에 출연하였던 저명한 변호사 아버지(존함이 Helge Aarseth임) 밑에서 좋은 가정환경 속에 자랐던 유로니무스
매사 굽힐 줄 모르는 신념과 확신에 차있어서 때때로 비현실적이고 자기기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유로니무스 (하지만 여러 모로 잘난 것이 사실이고 음악도 시대를 앞서게 뛰어났기에 아무도 대놓고 거스르진 못했음. 헬해머는 유로니무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만들고 조종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마치 ‘작은 폭군’ 같았다고 함)
점잖고 조용하지만 음악적 견해에 있어서는 확고했던 유로니무스 (여러 음악적 동료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던 표현임)
기타 칠 때 늘 기개 있는 모습으로 꼿꼿이 서서 연주했던 유로니무스
메이헴의 주축으로서 밴드와 관련해 늘 세세한 부분들을 꼼꼼하게 신경쓰고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특유의 끈기와 결단력으로 밴드의 앞길을 개척했던 메이헴의 선구자 유로니무스 (만하임은 유로니무스가 밴드에서 pedant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고집스러운 면모가 혼돈상태였던 메이헴의 향방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고 말했음)
아담한 체구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낮은 목소리와 강력한 말투를 구사했던 유로니무스
글씨체가 마치 자신의 외모처럼 매우 독특하고 귀여워서 단번에 알아보기 쉬웠던 유로니무스 (유로니무스가 만든 Deathcrush 카세트나 초판 LP 핸드라이팅 부분들, 지인들에게 보냈던 손편지를 보면 알 수 있음)
기타 뿐만 아니라 드럼 실력도 상당해서 소돔 전형 리듬인 3/4와 5/4 파트들까지 제대로 다룰 줄 알았던 유로니무스 (드러머 파우스트가 인정했음. 유로니무스가 소소하게 드럼 치는 모습은 86년도 L.E.G.O.영상과 몇몇 리허설 사진들에서 확인 가능)
집에서도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기를 좋아했던 유로니무스
감튀와 피자를 좋아하고 콜라와 예거를 즐겨마셨던 유로니무스
이란이나 시리아 같은 중동의 억압된 나라들(그러나 터키 공연 관계자도 중동만큼은 극구 말렸다고 함)이나 공산주의국가 알바니아(그 당시 아직 체제개혁이 미흡했을 때였음)에서 공연하는 게 꿈이었던 유로니무스
폴란드, 알바니아 등 지불 여력이 없는 가난한 국가들에 자신의 음악을 선물해주었던 유로니무스 (네크로부처는 유로니무스가 메이헴 음반들을 이런 나라들에 무료로 보내주는 것에 회의적이었음)
메시아와 함께 안티 파시스트 집회들에 참석하기도 했던 유로니무스 (빌리 메시아는 85-86까지 주로 리허설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던 메이헴 초기 보컬인데 원래 멀리 살아서 메이헴 동네인 Langhus까지 이동이 불편했던 판국에(Pure Fucking Armageddon 데모에 메시아 보컬이 없는 이유임. 오기 힘들어서 그냥 네크로부처가 보컬을 대신했음) 더 먼 릴레함메르로 이사감에 따라 메이헴을 탈퇴했음. 메시아가 메이헴에서 함께한 유일한 공연은 1985년 유로니무스 동네 Ski에서 진행된 축제 겸 밴드경연이었던 Follorocken 콘서트(유로니무스가 엉덩이를 깠던 공연)이었음. 이 경연에서 메이헴은 꼴등을 먹었고 멤버들은 어차피 대중을 엿먹이기 위해 나온 것이므로 이걸 우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함. 메시아는 탈퇴 후에도 멤버들과 친분을 유지했는데, 그래서인지 매니악이 공식 보컬이던 87년 Deathcrush 스튜디오 녹음 때 메시아도 몇 트랙 부를 의향 없냐고 연락이 왔다고 함. 이것이 Deathcrush 앨범에 보컬이 둘이 된 이유임. Deathcrush로 대표되는 메시아와 매니악 시절, 그러니까 80년대 후반 데드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메이헴은 어둡고 사악하기보다는 그저 공격적이고 대항적, 도발적 측면이 강한 유머러스한 펑크적 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음. 유로니무스는 이 시절 좌익사상을 갖고 있었고 이후 공산주의에 매료되는 과정을 거쳐 최후에는 authoritarian적 성향이 짙어졌음)
그 어떤 블랙메탈러도 갖지 못한 아우라와 포쓰를 지닌 유로니무스 (파우스트가 데드와 유로니무스에 대해 회상하며 직접 말했던 바임)
크리스찬 성서 속 개념의 사탄을 믿는다거나 사타닉 바이블에서와 같은 사타니즘을 신봉한 것이 아니라 옛 고대의 어둠신과 사악한 정령들을 숭배했던 유로니무스 (교회 태우고 기독교를 도발한 행동들은 모두 사탄을 추종해서가 아니라 당대 노르웨이 기성문화에 대항하고자하는 상징적 측면이 큼)
선반에 책을 가득 꽂아놓길 좋아하고 책도 많이 읽어서 다방면에 자신의 관점과 의견들을 갖고 있었던 지적이고 지혜로운 지성인 유로니무스
어디에나 베놈 포스터 붙이기를 좋아했던 유로니무스
한때 공산주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적 이상을 동경하여 노르웨이 청년 공산당 Rød Ungdom에 소속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흥미를 잃고 탈퇴했던 유로니무스 (입문 초기에는 사상에 정치적으로 매료되었으나 결국 실망하고 정치적 지지보다는 블랙메탈의 극단성, 사악함과 모종의 동질성이 있었던 역대 잔혹한 공산주의 리더들의 이미지를 인상 깊게 보는 것에 그쳤음)
위의 연장선상에서 ‘LP 가격은 그걸 사가는 사람들이 지불할 수 있는 만큼만으로 책정되어야 한다’며 처음엔 음반들을 소신껏 헐값에 팔다가, 계속 이렇게 가다간 쫄딱 망하겠다 싶어 제값 받고 파는 걸로 못내 정책을 바꾸었던 귀여운 사업가 유로니무스
DSP 사무실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세계 각지의 도시에 있는 자신의 연락망을 바늘로 찍어 표시해두었던 유로니무스
여러 악소문과는 달리 데드의 사후 사진들을 사악해보이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퍼뜨린 것이 아니라 데드의 평소 사상과 행동을 토대로 나름의 방식으로 기리려던 것이었던 유로니무스 (데드가 자살했던 주의 주말을 유로니무스와 함께 보냈던 만하임의 증언임. 자신의 도덕률을 적용해 유로니무스에게 화를 내며 밴드를 일시적으로 탈퇴하기까지 한 네크로부처(정작 본인은 가족이나 여자친구네 집에 하도 자주 머물러서 데드 곁에 없을 때가 많았고 유로니무스가 불평할 만큼 밴드에 소홀할 때도 많았음. 유로니무스가 네크로부처 여친한테 살해협박 보냈을 정도)와는 달리 만하임은 유로니무스가 악의가 없음을 알았기에 유로니무스의 행동에 큰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유로니무스와의 우정이 변치 않았음)
다른 밴드들의 프로덕션상 장점을 캐치해서 자신의 음악에 완벽하게 맞는 사운드로서 되살려낸다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갖고 있었던 유로니무스 (예를 들어 De Mysteriis Dom Sathanas 앨범의 드럼 사운드는 Vader의 Morbid Reich 데모에서 그 원형을 찾아 잡은 것. 요즘에야 서로 많이들 참고하지만 그 시절 언더그라운드 씬에서는 전무했던 일이었음)
베놈이 제시했던 익스트림 기반노선을 가장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독자적 장르를 굳히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그야말로 최극단 언더그라운드 시절을 거쳐 익스트림 계보에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이뤄낸 희대의 혁신가적 천재 유로니무스
버줌, 닭스론, 이모탈, 인슬레이브드, 엠퍼러 등 후대 노르웨이 블랙메탈 밴드들이 발전하도록 조언하고 창의적 분위기와 육성 환경을 제공하였으며 그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적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헌신한 블랙메탈계의 정신적 지주이자 수호신 유로니무스 (유로니무스는 DSP와 Helvete를 통해 많은 밴드들의 데모를 프로모션하고 팔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확립시켰음. 유로니무스는 항상 틀 안에 갇히지 않는 음악적 발상을 강조하며 후대 밴드들에게 전대와는 차별화된 사운드 표현을 하도록 자극과 도움을 주었음. 많은 메탈러들이 헬베테에 들락거리며 유로니무스와 생산적인 음악 좌담회를 펼쳤으며 유로니무스가 조성해놓은 창조적 분위기에 합류하며 실질적인 음악적 비전과 영감을 얻었음. 예를 들어 버줌, 닭스론, 이모탈의 주요멤버들은 본래 평탄한 데스메탈을 하고 있었으나 유로니무스와의 영접을 계기로 각기 노르웨이만의 독특한 블랙 사운드를 찾아갔음)
엄청난 창의력과 창작력을 갖추었으나 매 곡마다 리프에 한땀한땀 정성을 들여내 마치 최고의 명품처럼 완벽한 곡들만을 소량 생산하였던 블랙메탈의 장인 유로니무스
키우던 앵무새(흰색 코카투)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에서 알 수 있듯 인간적인 매력마저 갖춘 유로니무스
배가 튀어나오는 크롭탑을 입어도 트루한 유로니무스 (유로니무스가 입으면 그것이 곧 컬트)
알면 알수록 밑도 끝도 없는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블랙홀 같은 궁극의 매력남 유로니무스
금발도 흑발도 완벽 소화해내며(원래 태생은 금발인데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에 어울리게 흑발로 염색한 것임) 아무리 사악한 표정을 짓고 콥스페인팅을 해도 잘생김이 가려지지 않는 노르웨이 블랙메탈계 최강 비주얼의 소유자 유로니무스
인류멸망까지 두 번 다신 없을 전무후무 유일무이 천상천하 세계최고 절세미남 유로니무스
내가 3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전 재산이라도 털어서 노르웨이로 갔을 충분한 이유인 유로니무스
죽기 직전 잠옷 차림의 무방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울 상황이 되자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비극적 용자 유로니무스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창시자 유로니무스
블랙메탈의 절대반지를 주조했고 이 반지를 낀 채 승하한 블랙메탈의 제왕이자 신 유로니무스
그런 유로니무스가 커버아트로 계시는 이 Live in Zeitz 앨범에서는 메탈을 비롯한 여러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마법적인 전성기를 맞았던 80, 90년대 시절의 아련한 감성을 살갗 에는 음질(그래도 이전 라이브들보다는 노이즈가 덜하며 lo-fi 블랙메탈을 즐기시는 분들께는 위화감 없을 정도의 음질)과 함께 날것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 마지막 트랙 Pagan Fears는 1990년 메이헴 라이브 시리즈 중 셋리스트에 처음 등장한 것인데 곡 전체적으로 굉장한 리프 구성을 선보이며 위압감을 휘두르고 있다.
사족1) 메이헴 1990년 라이브 4시리즈는 모두 전설이지만 개인적으로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음질: Leipzig(유로니무스가 갖고 있던 마스터테잎을 소스로 하였음)>Zeitz>Sarpsborg>Jessheim
역사적 가치: Jessheim(노르웨이 블랙메탈의 시작을 알렸던 최초의 공식적 라이브)>Leipzig(데드가 죽기 전 전설적 4인방의 라인업으로는 마지막으로 녹음 및 발매된 라이브)>Sarpsborg=Zeitz
커버아트: Zeitz>Leipzig>>>>>>Jessheim=Sarpsborg
사족2) 메이헴이 유로니무스-데드-헬해머-네크로부처 라인업으로 했던 라이브는 위의 4시리즈 외에도 1990년 말에 터키 이즈미르에서 한 공연도 포함되지만, 이걸 넣지 않은 이유는 여태까지 공식 음원이 발매된 바가 없어 구색에 맞지 않을뿐더러 처음 4곡정도(셋리스트의 절반 정도) 하고나서 장소 자체가 폐쇄되어버려서 멤버 모두가 짜증스럽고 불만족스럽게 돌아가야 했던 미완의 라이브였기 때문이다.
다른 라이브에 비해 비하인드 스토리가 부족한 것 같아 당시 메이헴 터키 공연 기획자의 인터뷰를 토대로 이에 대해 적어보면, 메이헴은 1990년 11월 Zeitz에 이어 Leipzig까지의 동독 투어를 마치고 12월 터키 Izmir로 향하는 열차와 버스를 탄다. (원래는 독일 투어 이후 그리스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데드가 관계자로부터의 편지를 잘못 이해하고 공연이 취소됐다고 전달해 메이헴은 그리스에 가지 않았음)
터키에서는 Izmir와 Ankara 두 군데에서 라이브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후자는 경제적 문제와 연락망 부실로 인해 캔슬되었다. 결국 좌절되었으나 메이헴은 당시 Damascus(시리아)까지 찍으려 했다고 한다. 중동권에서 유일하게 성사된 라이브였던 터키 Izmir 공연 프로모터 Arcan은 유로니무스와 80년대 후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로니무스에게서 여러 희귀한 익스트림 밴드들의 소식과 데모 테잎들 그리고 Deathcrush 카세트 테잎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다.
Arcan은 공연 당일 Izmir에 도착한 메이헴 멤버들을 이끌고 갈 만한 곳을 물색했으나 공연 전까지는 시간이 다소 빠듯한 일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멤버들을 공연 장소와 가까운 Hamam(중동지역 나라들의 공용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이때 메이헴 멤버들은 배에 타월만 걸친 채 터키식 전통 목욕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사진으로 남겨놨어야 했다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펍에 가서 공연 시작 전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Arcan은 Dead에 대해 회상하길 데드는 자신의 말에 연신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으며, 과다출혈(코피+자해)로 인해 창백하게 질려있는 얼굴에다가 몸에는 상처가 없는 부위가 없을 정도로 전신에 걸쳐 많은 상처들이 있었다고 한다. 데드는 자신의 옷가지들을 땅 속에 파묻은 뒤 공연 전에 꺼내 입어 마치 매장되어 있다가 죽음의 보컬을 내지르기 위해 삶으로 돌아온듯한 느낌을 추구하였다고 전해진다. 펍에서도 데드는 혼자 가만히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고 한다.
그 당시 터키에서는 장소 규제, 통금 등 때문에 공연시 헤드라이너가 가장 먼저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라이브 장소 소유주는 메이헴이 가장 먼저 공연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오프닝 밴드 Hazy Hill의 공연이 길어지자, 정작 메이헴의 순서가 왔을 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메이헴 라이브 도중에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메이헴이 라이브를 하고 있던 장소는 Izmir시의 장터에 속해있었고, 장소 소유주는 공연 기획자 Arcan에게 해가 지고 난 뒤에 운영하려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라이브 도중에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경찰은 소유주에게 일단 장소를 폐쇄하라고 말이 되어있던 상황이었고,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던 Arcan은 메이헴이 Freezing Moon을 하고 있을 때부터 경찰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문제는 셋리스트의 Freezing Moon이 끝나고 Carnage 시작 순서가 되었을 때 터졌다. 데드는 여느 때와 같이 Carnage!!!!를 외쳤고 눈치 빠른 유로니무스는 경찰이 라이브를 된통 망칠 낌새를 보이자 마이크에 대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라이브가 강제 중단되고 장소가 폐쇄되었다.
유로니무스는 공연 전 음향 담당자에게 라이브 테잎레코딩을 부탁한 바 있었으나, 경찰이 강제 종료 시켜 혼돈스러웠던 정황상 테잎을 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메이헴은 받기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비마저 받을 수 없었고, 숙소에서도 한밤중에 쫓겨나는 등 찬밥 신세를 겪어야만 했다. 이렇듯 터키 라이브는 전반적으로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메이헴 역사상 최악의 공연이었다.
사족3) Live in Zeitz 커버아트의 유로니무스 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아트 그 자체이지만 사진사는 안타깝게도 바르그임
사족4) 적어도 Mayhem의 팬이라면, 사실관계에는 무지한 채 오직 자극적인 사건들에만 관심을 두는 피상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저속하거나 외람된 온갖 이미지(ex. 멤버들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짤이나 패러디, 저자의 짙은 정치 성향을 알고 나면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로오카’ 서적 -주요 작가가 “바르그 비케르네스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반유대주의적인 사람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노르웨이 인문주의자 협회 고문’이라는 인간임-, 소품 구경 외에는 의미가 전혀 없는 하이틴 개그물인 데다 단순히 대중적 관심을 얻기 위해 당대 블랙메탈 씬의 인물들에 대한 잘못된 사실과 우스운 이미지까지 조작해 퍼뜨린 ‘로오카’ 영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떠도는 가짜 루머들을 짜깁기한 별의별 기사나 게시물 등)의 얄팍한 소비만을 반복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본질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유로니무스와 그의 활동 당시 메이헴 및 초기 노르웨이 블랙 씬에 관심이 있으신 입문자 분들은 굳이 먼 길 돌아갈 필요 없이 멤버들이나 관련자들의 인터뷰 원본을 추천한다. 당장 로오카라는 영화만 보아도 진실과는 영 거리가 멀다. 상업성이 과도하게 짙은 허위 스토리 전개에, 기본적인 캐스팅부터 여러 치명적 실수들을 저지른 허점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웃기지만 단적인 예로, 영화와는 달리 사실 바르그는 당시 2년정도 된 여자친구가 있었고 여자관계나 취향에 있어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람이어 왔으며, 유로니무스는 전쟁과 비역질은 영원하리라는 문구를 즐겨 쓰던 자발적 솔로였다(본인의 음악과 언더그라운드 씬의 리더로서 한평생을 바치느라 사사로운 일들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 즉 필름을 재미로 보는 건 좋지만, 사실무근인 측면들이 많다. 필름이 출시되기 오래 전 나왔던 동명의 저서 또한 블랙메탈 부분에 있어서는 메이헴이 구축한 블랙메탈 음악의 심도 있는 고찰보다는 씬의 사악한 이미지를 흥미위주로 과도하게 부각시킨 면이 있다.
유로니무스의 죽음을 팔아먹고 희화화하며 관심을 구걸하는 깊이 없고 자극적인 인터뷰나 2차적 저작물들은 피하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유로니무스 덕분에 메이헴의 명맥을 이어가고 명성을 부지하고 있음에도 그런 인터뷰들에 응하며 10년지기 친구였던 유로니무스가 죽었을 때 전혀 슬프지 않았다는 등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네크로부처가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더불어 현재 유로니무스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살인자의 자기방어적 회상만이 남아 있을 뿐,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로니무스는 그 업적에 비해 오명과 오해가 너무 많기에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사실을 기반해 작성하였음*
*당장 유로니무스에 대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었으나 나의 유로니무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끝나지 않는 것이므로 또 뭔가 중요한 게 떠오르면 언제든 추가할 예정*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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